0727 소재
#어느_날_악마가_내게_키스했습니다
~마녀의 고해 -벌칸의 기도문 이야기~
TO BE CONTINUED
w. SKY
신은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한다. 오늘 하루가 평안하길 바랍니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전염병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 ─그래. 이 나라는, 이 마을은 병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곳곳에 퍼져 사람을 병들게 하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다. 삭막해지고, 피폐해지고 땅은 거칠어지고, 숨소리 하나마저 예민해진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기도 수만큼 하루하루 죽음이 쌓여간다. 나이 불문, 성별 불문 죽음만이 공평하다. … 공평한가?
죽음의 냄새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리해 있었으나, 그 속에는 곳곳에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삶을 연명하고자 가시를 세운 사람들. 환자를 수용해야 할 병원은 이미 과부하된 지 오래되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부족했고, 죽음은 만연했다. 그러한 풍경을 견디다 못해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 그 가운데 남은 것은 오직 바람뿐. 기원만이 유일한 구원으로 남겨진,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 마을의 유일한 성당. 하나 있던 신부가 명을 달리 한 후, 그곳에 오게 된 수녀. 그리고 ─ 마녀를 잡아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이. 그의 사명이 가리키는 사람이 있었다. 뱀의 저주를 받아 마녀가 되고야 만 사람. ─ 원한 적 없던, 원하지 않던 운명에 갇혀 죄인이 된 이. 집행자는, 이 마을에 닿기 전부터 쌓아온 죄악에 한 방울을 더하지 못해 악마이자 마녀이지만 동시에 인간인 이에게 사명을 빼앗기고 말았다.
수레바퀴는 야속하게도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누군가는 진실이 가려진 허구에서 허덕이고, 누군가는 감춰낸 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는 시간이 이어진 끝에, 끝내 수면 위로 드러나고야 말았다. 감추고 싶었던, 알고 싶었던. 서로 다른 이유로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 것이 드러난 때, 누군가는 조악스러운 흐름에 웃음을 터트렸는지도 모른다. 예고된 추락 속, 소리 없는 울음이 함께 떨어졌다.
신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신을 믿지 않는 자와 거짓된 신을 믿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감히 경외하지 않은 죄로. 감히 그릇된 이에게 신의를 바친 죄로.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하였고, 온전한 침묵의 휴식을 부정당하였다. 마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나 같은 자리만을 맴돌게 되는, 양 면의 구분이 없어 끝내 만나고야 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약속의 땅이 아닌 버려지고 외면당한 땅의 한 켠에서, 두 죄인은 다시금 만나고 말았다. 붉은 피로 이어진, 이 또한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면식 없는 타인에서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히 스쳐간 사이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버린 사이까지 모두에서 가능하다. 그 각양각색의, 셀 수 없이 많은 모양을 가진 모든 '관계'에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는 것일까.
첫 만남부터 층층이 쌓인 관계는 아슬아슬하여 무너지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붕괴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게 된 것은 무릇 한 사람에 의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새로운 지평, 감춰졌던 이야기에 다가갈수록 흔들리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에서도 마음은 자라나기 마련이었다. 천으로 가려두어 보지 않고자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모양이건 자라나고야 말았다.
비극은, 때로는 희극을 닮아있었다.
"... 이제야 만나게 됐네요."
"보고 싶었어요."
"단 한순간이라도 좋아요. 절 사랑해주세요."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걸음을 딛고 나아가는 것은 생존을 위함이었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피해 하룻밤을 보내고자 찾은 곳이었으나 막상 성당에 다다른 이에게 찾아든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마치 주문과도 같은 말. 첫 만남이자 재회인 순간, 과거가 현재에 재림한 순간. 로더릭은 눈앞의 이를 마주한 그 순간, 전신으로 알 수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본능과도 같았기에 머리로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과거와 현재가 한 면이 되어버렸기에 머리로 깨닫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것이었고, 사실은 그 성당에서 한 발자국도 옮겨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틀림없는 현재였다.
로더릭은 분명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삶을 살아왔으나, 마냥 다르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과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수도, '같은 사람'인 이유일 수도 있었다. 세상은 많은 것이 달라졌으나 또 같았고, 주변 환경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 모양새는 크게 다름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스스로가 차이를 두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좀 더 다른 삶을 살아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을까.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실상 시간만 주어진다면 길이야 얼마든지 기를 수 있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이었으니 별다른 이유는 없었을 수도 있다. 다듬을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눈앞에 선 이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인지 의심했고, 같은 맥락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수녀복을 입고 있는 이유야 알 수 없고, 현재가 아닌 과거에 얽매여 있는 이유도 알 수 없었을지언정 인간이었기에 새 숨을 얻어 살아온 것이지 않겠냐며 스스로의 귀를 막고 눈을 가렸다.
저주가 풀렸어도, 이미 망가진 세계였기에 회복에는 오래 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무너진 세계였기에 다시 세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탁하고 뿌옇게 흐려진 하늘에서 흰 눈이 내려 세상을 뒤덮는 것이 또 하나의 멸망일지라도 그 뿌리는 저주받았던 이들의 영향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라 생각했다. 얄팍한 믿음과 희망은 너머가 보이지 않는 유리창과 같았다. 자신의 모습조차 비춰지지 않는 창은 그저 가림막일 뿐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오래전,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단면만을 보고 선택한 이유에 있었다. 그렇다면, 메이 홉킨스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전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을 테고, 사명을 부여받은 이에게 사명 이면의 것이 처음부터 안내되었을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작금에 이르러 논의될 사안은 아니었다.
어쩌면 시작부터 뒤틀려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는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절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걸."
"릭은 절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거."
어쩌면 결말은 시작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지는 만큼, 갈증은 더해져 간다. 과거가 범람하여 그 속에 잠겨 들라 속삭인다. 그 속에서 손을 내밀어, 나아가기를 청한다. 이전에는 그가 밀어냈던 이를,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저물어버리고 만 때와 달리. 정착하지 못한 채 헤매는 두 사람을 엮어, 사람 속으로 나아가기를. 하지만, 눈밭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바닥에 흰 자욱만이 짙어져 갔다. 그때에만 해도 모든 것이 눈 속에 묻혀 있기만 했다. 불꽃이 일렁이는 풍경 속에서도 녹지 않는 눈은 마치 만년설과도 같았다. 열쇠는 이미 손에 쥐어졌으나, 문을 열 수 없었다. 사랑은 무거워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동시에 가벼울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곁에 머물러 있음에도, 혹독한 겨울이었다. 둘이기에 춥지 않았으나, 둘이었기에 더욱 추위가 거셌다. 그 풍경 속에서 눈앞의 이가 눈보라 사이로 사라져 버릴 듯,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만 보이는 이유는 이 겨울의 추위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음속에 머문 불안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가 사라지면 싫을 거 같나요. "
"… 그렇겠지."
불티가 눈에 튀어 녹아들자면, 열기가 닿았다. 숨이 멎은 듯, 시간이 멈춘 듯 아주 느리게 피부로 닿은 언어가 전해져 왔다. 처음부터 변함없이 한결같은 요청. 나를 바라봐주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 눈밭은 새하얗기 그지없었으나, 황무지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것은, 다만 한 가지의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온기로 닿아왔던 여린 피부가 짓이겨질 듯 스스로를 참아내고 있었기에, 그는 그곳에 자신을 가져갔다.
그는 당신에게. 당신은 그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닿았으나, 서로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었다. 손이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은 필시 그의 망설임이었다. 두려움이었다. 닿을 수 있음에도 머물지 못하는 망설임은 모순과도 같았고, 그것이 그의 동요였다. 매 순간 수많은 찰나가 함께하고 있었다.
여전히, 눈이 내렸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맑게 개지 못하는 것은 하얗게 물든 밤하늘과 더불어 사람의 마음도 함께였다. 그러니 초대받지 못한 꿈속에서마저 눈보라를 헤맬 수밖에.
아침 녘이 밝아오면 몰아치던 눈보라는 이미 그친 후였으나, 아직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은 그 무엇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발자국이 남았다. 발자국 모양으로 파인 눈 위로 따스한 찻물이 담겼다.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으나, 시작점을 벗어나 있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서도 하나, 둘 가닥이 풀어지고 있었다. 퍼즐 조각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은 건, 누구였을까.
알고 싶었으나, 알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연결점을 찾아 잇는 데 어려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추측하고 곡해하고 오해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죄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되풀이되지 않는 과거.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로더릭은 진실에 닿고야 말았다. 제자리를 찾아간, 빈 공간을 남겨둔 퍼즐 조각을 애써 외면했지만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를 끝내지 못한 사람. 멸망을 끝내고 싶어 한 사람. 그 끝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끝내고 싶었기에, 스스로를 끝내고자 하여 그토록 사랑을 원한 사람.
"저는 살아있지 않아요. 오래전에 죽은 거지."
"행복이 끝난 순간에 저는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거기에 다른 의미를 붙이지 마세요. 아무것도. 그것 외에 아무 것도 붙이지 마세요."
한 명의 선택과 바람은 죄와 저주가 되어 끝없는 시간을 살았다. 저주는 영원을 살았다. 사람을 갉아먹고, 희망과 절망 속에서 담금질하는 곡예를 보며 살았다. 로더릭은 자신의 선택이 남긴 죽음을 목도하고 있었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못하는 사람. 죽고 싶으나 죽지 못하는 사람. 뱀의 저주로 인해 마녀가 되어버린 사람은, 저주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었다 믿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마녀였으며, 악마였다. 집행자의 사명을 앗고, 한 순간에 행복을 앗아간 악마. 그의 삶은 한 명 분의 삶을 제물로 삼아 영위하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고 있습니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미안해. 그는 여전히 죄인의 신분이었고 그 죄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에게 있어 감정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죄를 용서할 수 없을지언정, 그 용서를 바랄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품에 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나락에서 살아온 사람. 자신을 찾아 긴 시간을 헤맨 사람. 결코 스스로의 이야기를 한 적 없는 사람이었으나, 더는 묻고자 하지 않았다. 사랑을 바란 사람의 이야기는, 영원이라는 눈밭에 묻혀버렸다.
하여 눈밭에 몸을 뉘이고자 했다. 그의 황무지에 내린 눈에는 메이 홉킨스가 선명히 자국을 남긴 지 오래였다. 그 자국은 지금껏 외면해왔을 뿐, 인식하지 못할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자리해 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일할 불빛이 남겨진 곳에서, 돌아오지 않는 밤을 침묵으로 지새우고 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사랑하네."
숨결이 닿을 거리가 좁혀져 부드러운 것이 당신에게 닿았다. 숨이 교차한다. 짧은 입맞춤이 떨어져 간다. 천사의 입맞춤은 고통스러우나 사람을 구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악마의 입맞춤은 달콤하지만 나락으로 이끈다. 선고를 받게 된 당신에게 죽음은 나락일까. 아니면 구원일까. 행복이 끝나고도 종막을 맞이하지 못한 자에게 드디어 막이 내린다. 끝을 고하는 이는 같으나, 끝을 맞이하는 이는 달라졌다. 이것은 하나의 끝이나, 하나의 시작. 두 번째의 끝이자, 두 번째의 기다림이다. 그것은, 흐르지 않을지언정 눈물이었다.
고해를 들어주지 않는 절대자를 믿지 않되, 고해를 들어주는 인간 신을 믿어 종교로 삼은 이가 있었다. 메마른 이가 세워 올린 이단은 끝내 저주받아 영원의 고리에서 불타는 형벌을 받았다. 악몽과도 같은 저주를 남긴 주체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으나, 다만 누군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그런 악몽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로 하여금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이 있다. 그자가 남긴 이름을 악몽이자 벗 삼아 시간을 견뎌온 사람이 있다.
마녀는 인간에서 시작되었고, 저주받은 사람이었기에 눈을 뜨면 자신의 형벌을 끝내줄 이를 찾아 나서는 고행 속에서 살았다. 끝내 만나고야만 이는 악마였으나, 신이었고 그러나 결국 사람이었기에 영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 자는, 악마도 마녀도 신도 아닌 인간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 앞에서 오랜 기다림을, 끝나지 않을 기다림을 약속했다.
"만약, 저를 잊지 않고 기다린다면 그때는… 저를 행복하게 해주실래요?"
미래에 대한 물음을 건넨 이는, 채 끝마치지 못한 고해를 품은 채 눈을 감았다. 곤히 잠든 몸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순간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졌다. 주어진 시간이 끝났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곧 자장가였고, 진혼곡이었다. 다만 또다시 그의 바람이 악몽이고 저주가 될 것이 두려워 차마 바람을 바람이라 칭하지 못했기에 깨어날 리 없는 이에게 대답이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언젠가, 만약이 있다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망각의 축복을 받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간 후, 두 명 분의 기다림이 끝나는 그곳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같지만 다른 사람으로 또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그 때엔… 이 같은 괴로움 없이 행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