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6 매짧글 소재
0715 매짧글 소재
스스로를 갉아먹는 내면을 감싼 단단한 빙벽. 그는 그것으로 스스로를 가렸으며, 또한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럼에도 사람을 떠나지 않고 사람 속에 머물렀으나, 그럼에도 사람과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버텨내고자 하였으며, 무너지지 않고자 하였다. 그는 스스로가 녹아내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을까?
아니. 녹아내리게 된다면, 그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녹아내리는 빙산 너머 혹은 그 안에서, 무엇이 자라나건 무엇이 싹을 트건, 무엇이 자리하고 있건 방해할 눈 앞을 가리운 어둠도, 그를 가둔 얼음도 모두 그 자신에게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둠을 걷어내는 것도 얼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자의적이어야 할까. 어쩌면 어둠을 비집어 빛을 들여보내고 얼음을 부수지 않고 녹이는 것은 ─ 타인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을 비롯한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 관계야 말로 사람에게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혹은 그 계기를 주는 요소인 것이다. 기록 그 작은, 실낱같은 길을 거머쥐고 선택하는 것은 스스로일지도 모르지만.
그래, 그러하기에 그 또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알아차리고도 외면하기를. 어째서 외면한 것인가 묻노라면, 그는 그가 앎으로 인해 상대에게 줄 상처라 염려되었다 이야기하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기민한 감각은 그조차 알아차리고 말았기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아 알아차렸음에도 그 사실을 외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은 언제까지고 같게 흐르지 않았으며 외면은 상처를 더해가고야 만다. 그 결과, 선택은 또다시 옷을 바꿔 입는다.
"그냥, 당신이 좋아서 그래요. 신경쓰지 말아요."
"이렇게 예쁜데, 왜 나를 좋아하나."
"좋아하는데 이유가 왜 필요해요."
─ 그러니 그런거지. 아까운 사람인걸.
여전한 것이 있음과 동시에 달랐다. 생기 넘치는 녹빛 눈동자에 담긴 애정은 상처와 기다림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고 곁에 머물렀다. 그들은 충분히 이성적이었기에 공사의 구분에 어려움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주변에서는 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당사자로서는 틈새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틈새로 닿아온 향과 숨이 언제그랬냐는 듯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과연 전과 같았을까. 인사이자 가벼운 유흥의 입맞춤이, 있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알아버린 마음이 있기에, 목격해버린 순간이 있기에 외면은 언제까지고 외면으로 남아있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눈 앞의 이가 '자신과 좀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것이었으나 그의 행복을 부수고 있는 것은 되려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제가 그렇게 별로였어요?"
"누가 자네더러 별로라고 하던가. 사람보는 눈이 없는 자겠는 걸."
"정작 그 말을 해줘야 할 사람이 거들떠도 안 봐주는데 그럼 별로겠죠."
그 때, 그는 어떤 답을 했던가. 어떠한 답도 하지 않고 침묵하였다. 그의 외면이, 그의 침묵이, 그의 모호함이, 그리고... 그의 잔인한 ─한 사람을 위하였다는 이유면서 정작 그 한 사람을 배제한─ 배려가 결국 독이 되어 사람 안에 차오른다. 관계에 있어 쥐고 있던, 흔하게 쥐어왔던 주도권을 내어 놓고서 영민한 머리로 계산을 한다 하여도 그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그는 당신의 뜻에서 벗어나는 사람이었기에. 두려움을 삼키고, 상처를 삼켜내는 시간의 연속이었겠지. 가벼운 만남과 호흡으로도 만족하던 이일지라도 언제까지고 견고할 수 만은 없는 법이었다. 덧나기만 하는 상처는 끝내 곪기 마련이고, 하중이 과해지는 둑은 무너지는 법이다.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어떤 방식으로건 끝을 맞이한다.
손이 아닌 소매 끝만을 붙잡은 채, 올려다 보는 눈에 담긴 복잡하게 얽히다 못해 흘러내리는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었다. 경계를 명확히 그어 보이지 않았기에, 흐릿하여 보이지 않는 선을 찾고자, 그 선을 넘어 지독한 마음의 끝을 매듭짓기 위해서. 어쩌면 의도와 계산을 넘어선 충동과도 같이.
회잿빛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미력하게 떨림을 보인다. 가까이, 그래 눈 앞에 머무른 이가 아니라면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정 확고히 밀어내고자 한다면 밀어낼 수 있는 자리임은 틀림없었다. 그 망설임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무엇을 내 보였을까.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감정이 밀물처럼 차오른다.
의도와 계산을 넘어선, 충동이 찾아 든 시간. 막아두고 닫아두었던 벽을 넘어서는 시간. 두 사람의 숨이 하나로 엮이는 순간에 어떤 대답이 필요하겠는가. 사막의 모래에 감정이 밀물처럼 흘러와 쌓여있던 메마른 상처에 물기를 더한다. 사막의 모래는 빙산의 굳은 얼음층을 녹여낸다. 하지만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후순위인지 분간할 수 없다. 고위도와 저위도의 두 지대가 마주하는 것은 논리적 명제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화 한 톨 없더라도, 굳이 눈 속에 담긴 감정을 보지 않아도 밀려오는 감정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손 자국이 남은 소매가, 팔이, 그 손이. 원하는 것 만큼은 내어주지 않는 채 자리를 고수하던 이가 충동이 시작이 된 지도 모를 결심을 내린다. 순간의 결심은 행동으로 이어지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것은 호흡이 섞이는 것 뿐이 아닌 접촉을 불러낸다. 수많은 시간 그가 낸 상처 위로, 녹아내린 물을 스미게 한다.
"정말... 잠겨 죽어버릴지도."
"농담으로도 죽는 건 싫어요."
"한 번만 더 해봐도 될까요? 잘 모르겠어요."
뒤늦게 배운 마음, 뒤늦게 깨달은 마음. 그리고, 처음 맞이하는 마음의 시작. 허나 익숙지 않을지언정 처음이 아니기에 갈급함 속에서도 여운을 느낀다. 덥혀진 속삭임이 서로를 간질이고, 웃음소리가 되어 귓가를 맴돈다.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도 계속되어온 한 사람의 마음을 향해 문이 열린 때, 다른 한 사람은 이제 그 반대의 문은 두드린다. 서로를 온전히 느낀 시간의 끝에서 함락되어버리고 만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끝. 기나긴 망설임이란 결국 함락을 향한 여정이었던가. 하나의 마음이 끝을 맺고자 한 시간, 하나는 더이상 하나로 남지 않아 둘이 되었음이 증명 되었다. 텅 비어 있던 곳에 충만함이 차오른다. 관계의 주도를 쥔 것은 누구인가, 하면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중요치 않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잡았고, 더이상 외면하지 않으며 바라보매 서로가 서로를 이끄는 지표이자 별이 되었음이라.
그렇게 관계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답을 내린 이들에겐 더이상 같은 망설임은 존재치 않는다. 매혹시킨 이의 잘못인가, 매혹된 이의 잘못인가. 곁에 두는 이를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기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사람이 살아가는 길의 하나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