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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L 唯一 2024. 11. 5. 09:06

241104

 


 

 

 

 인세의 틀을 벗어난 존재에게 있어 인간의 생이란 짧게 타올랐다가 지는 한 때의 불꽃에 불과하기 마련이다. 비록 저를 검게 물들일 정도로 깊게 연관된다 한들, 인간이 아닌 것에게 인간의 생이 가당키나 할 것인가. 하니, 그것은 제 왕이 저를 보는 시선의 특이점을 눈치채었다한들 자신의 자리는 아니라 여김이 옳았다. 상대가 지닌 속내를 뒤집어보지 않아도 알아차리게 된 무언가에 대해서 내색하지도 일언반구(一言半句)조차도 하지 않는 채였다. 제 왕을 위한다는 것은 다름이 없으나 자신의 언행이 괴로움이 될 수도 있음을, 그것은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오롯하였으며 온전하였고, 또한 유일하였으며 그것의 시각에는 단 하나만이 유의미하였기에. 언제나처럼 바라보고, 또 함께하며 변함없는 모습의 지속. 한없이 가까우나 가까워지지 않을 듯 멀기만 한 존재.

 그것에게는 상동한 것이 상대에게는 상이함을 알지 못한 채 토해진 말은 이해를 담지 못했고, 그것이 범인일 수 없는 이유였다. 밀어내지 아니하나 포용하지도 아니한 채, 관조하고 방관하고. 또한 선이란 것을 무관히 여기며 드나드나 정작 스스로의 패는 보이지 않던 이. 인외의 것은 왕의 사모에 분명한 답을 내어놓지 않고서 청이란 이름 하 왕의 연(戀)을 약조하기도 하였다. 시일이 지나 제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뉘 잡을 수 있었을까.

 

 아주 오래되고 끊어지지 않은 축복과 약속.

 그래, 그들은 월하의 붉은 실과는 다른, 연(連)으로 이어져 있음이었다.

 평화와 당장의 안위에서 왕이 아닌 인간이 빈 소원이 이루어진 그 날. 아주 오래되고 끊어지지 않던 축복과 약속은 끝을 맺고 인간의 설화가 문을 열었다. 월하에게서 앗아 들었던 붉은 실타래는 신수의 손에서 다시금 월하에게로 돌아감이 옳았다. 제 아무리 신수였을지언정 인간으로 격하되었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던 삶에서 시간의 제약을 받는 삶으로 발을 디딘 생명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새로운 것이었으며 낯선 것이었을 뿐. 그러나 그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었을지도.

 숨결이 섞인 순간, 낯선 행위에서 느끼지 못한 무엇인가가 그의 안을 간질였으나 그는 자신을 다스렸다. 인외의 것일 적에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인간으로 격하된 후에는 인간의 규율에 따라. 왕과 신수는 대등한 위치에서 군신관계로 변화하였고, 그것은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무엇인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났고, 무엇인가 시작되었던 것이 끝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것은, 오직 단 하나─라는 것. 그러니 절벽에서 피어나는 꽃, 찾는 이가 없어도 위태로움 속에서 자리하여 봉오리를 맺었다.

 

 "이 종이에 소원을 적어 연등에 같이 피어올립니다. 그러면 소원이 신께 닿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대도 빌고 싶은 소원 하나 정도는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쎼요. 비밀이라고 해두죠."

 "일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지도 궁금한걸요?"

 "원래 이런 건 말을 꺼낸 이가 먼저 말해야 한다고 압니다."

 

내 소원은, 일을 지키는 거예요. 일.

 

 그것의, 그의 소원은 언제나 단 하나. 자신의 왕. 자신의 전하. 유일한 이의 안위. 그 끝에 상대의 소원은 결국 듣지 못하였음을, 그는 의식 한 켠으로 밀어두었음이렷다. 하늘을 향해 오른 붉은 등이 어떠한 원을 담았을지는. 이미 타고 남은 재만이 알 터. 눈앞에서 승천하는 연등에 반하듯 꺼져버린 불씨를 피어 올리고자 한 강한 염원은 이루어졌으나, 염원의 뿌리는 흙 아래에 터를 두고 가리어져 있었으니. 메마르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 

 

 어둠이 흩뿌려진 하늘로 또다시 등이 오른다. 

 누군가의 소원을 담아.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 누군가의 마음이 넘쳐난 만큼. 가득한 붉음을 담고서.

 

 "계속 보고 싶고, 보니까 살짝 다가가고 싶고. 다가가니 모른 채 닿고 싶어지고."

 "그렇게 마음을 확인하지 않으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버리죠."

 

 "당신을 사모합니다, 류환."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입을 열어주세요."

 "저와 같은 길을 걸어주시겠습니까?"

 

 류환의 머리(이성)는 당연하다는 듯 답을 내어놓았다. '언제나 볼 수 있고,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것이며. 원하신다면 언제건 닿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 당당하게 내어 놓을 수 있는 불변. 허나 대답이 가로막히는 것은.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이해'.

 하나하나 단어의 의미와 효용. 그 조합의 의미까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에 내포한 것이 결코 다르지 아니하다. 류환은 일의 원을 언제나와 같이 들음에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일이 저에게 바라는 이해는 그러한 것이 아님을. 인간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감정에 귀 기울여보라는 말임을. 우습게도 이미 인간의 몸이고, 인간의 생에 발을 딛었음에도 신수에서 완연히 벗어나지는 못한 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그의 생애란 인세에 맞춰진 삶이 아니었으니.

 

 그리하여 류환은 제 앞의 이를 바라본다. 

 

 일. 노일. 나의 왕. 나의 전하.

 눈앞의 이도, 자신도. 처음 즉위식에서 만났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같은 마음인 적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류환은 제 안에서 일렁였던 것을 기억했다. 증명을 넘어섰던 때,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마주한 호흡 속에서. 그것의 정체는 여전히 모른다. 평생 알 길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평생 알고자 할 일도 없을 것이라 여겼다. 

 자신은 결코 눈 앞의 이에게서 떨어지지 못할 것이다. 아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떼어놓고자 하여도 자신이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에. 지근이건 원근이건, 그 어디에서건. 그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하며 살아갈 것은 분명했다. 자신이 신수로 났을 적부터, 인간이 된 이후로도. 그리고, 앞으로도. 제 안을 휘젓던 광기가 눈 앞의 이를 취하고자 하는 와중에도 상대를 지키고자 자신을 저버릴 만큼.

 그 마음이. 눈 앞의 이와 온연히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모가 사모가 될 때까지 외면해 온 것을, 지금에 와 모두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전하."
 "지금의 나는 전하께서 만들어낸 것이죠. 인간이 된 것도, 내 안의 모든 것도."
 "나는, 일이 이 지상에서의 업을 갈무리하고 떠날 그날까지 늘 곁에 있을 텝니다."
 "곁에 있어달라는 거라면, 싫다고 하더라도 머물 것이니, 오히려 내칠 수 없음을 탄복하게 될지도 모르죠."
 
 호숫물은 담아내어도 흘러내리기 마련이고, 삼켜내어도 본연의 것에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배출되기 마련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 합을 이룸은 예부터 내려오는 일일 지어나 외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랑 그 틀에서 벗아는 것이니,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옳았다. 인간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인간이 되지 못하고 이물질로 남을 것이라 여겼던 이에겐 인간으로서의 삶이 찾아들었다. 신수 류환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류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으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낯선 것에 적응하고, 인간이 삶을 알아가며. '인간'으로의 삶에 발을 딛기 시작한 자. 그러니 그 존재가 호숫물에 톡, 하고 떨어진 오물일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일이 내게 듣고자 하는 대답은 아님을 압니다."
 "유예했던 말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축복과 약속이 구름 속에서 노니다 끊어지고 말았으니 인간의 길이 곧 하늘의 뜻이지 않겠는가. 류환은 고요한 침묵을 유지하였다. 언젠가 그러했듯, 조금은 옅고 모호한 미소를 지은 채.
 
 "일. 애석히도,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이입니다."
 "그러니 지금껏 앎에도 외면하고, 신경 쓰지 않듯 지내온 것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는, 일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나를. 인간인 나를 당신이 만들었듯. 앞으로의 나 또한, 당신이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누구의 앞에도 당당한 왕이 되십시오."
 "그 누가 당신의 길을 막겠습니까."
 
 녹음과도 같은 눈에서 비켜간 시선. 당신이 끼워준 비취색의 옥가락지가 둥글게 빛나는 손을 잠시 내려다본다.
 
 "물론…, 여전히, 당신의 옆 자리는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것이 옳다 여깁니다."
 "그럼에도. 내게서 실타래를 앗아간 월하는 가끔 원망스럽기는 하더군요. 그 끝이 어디에 있음을 모름에도 말이지요."
 
 우습게도. 애초에 실타래를 뺏어든 쪽은 본인이었음을, 적어도 그 자신은 알고 있으며 제자리로 찾아간 것에 불과함에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내본다. 혼잣말인 듯 고요히, 나즈막하게 흩어지는 목소리로.
 그리고 다시금, 시선은 당신을 향한다.
 
 "이미 알고 있으실 터이나, 이런 나입니다."
 "이토록 이기적일 나입니다."
 "이런 내게, 알려주시겠나요."
 
 "내가 모르는 일, 당신을.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나를."
 "나는 오롯이 한 명에게만 속한 인간이지 않습니까. 순환하는 계절처럼. 언제까지고 그 길에 함께할 테니."
 


 
 일어서야지요. 일어서서, 딛고 서야지요. 왕의 길을 걸으셔야지요. 그리 일어난 붉고 붉은 비단길에 매화가 피어났습니다. 하이얀 눈이 내려 붉은빛을 머금었고, 그곳에서 피어난 봉오리는 적색 옷을 갖춰 입고서 춤을 추었습니다. 절벽에 다다랐음에도 채 꽃 피우지 못한 그것은 아슬아슬한 절벽에 매달려, 찾는 이가 없어도 위태로움 속에서 새하얗게 자리했습니다.
 그곳에서 길고 긴 세월이 흘러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떨어지는 잎에 빌고 하늘로 오르는 등에 빌었습니다. 언젠가 어느 날에서 염원이 닿기를 빌었습니다. 검은 개가 스산하게 울부짖는 가운데에서 길을 잃고도 놓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가 아님에도 외로움에 사무쳐 그리움에 잠겨 메말라 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릅니다. 교차하는 녹빛의 시선은 결코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어긋나는 높이를 맞추고자 고개를 들고, 고개를 내리듯. 균형이란 한쪽에서 희생한다 하여 유지되지 않는 법입니다. 기울어진 균형 자체를 움켜쥐고 있던 이는, 제 스스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발을 들이고자 합니다. 눈물을 닦아줄 손도, 달래줄 목소리도. 이제는 닿을 수 있을 터이니.
 
 당신이 눈을 한 번 깜빡이면, 류환의 손이 보입니다. 류환이 보입니다. 언제까지고 당신 하나만을 그 눈에 담아온 이는, 지금도 여전히 당신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외면해왔음을 부정하지 않은 이는, 지금에 와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노라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음을 알기에 그는 당신의 절벽에 손을 내밉니다.
 
 "일. 나는 언제고 당신의 것입니다."
 
 
 
 

[BGM : 심규선 - 꽃불 가야금 커버 (원본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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