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의 연이 끊어지고 인간의 날이 도래하고부터도 시간이 흘렀다. 아직 그 사실은 공표되지 않아 화국의 사람들은 여즉 신수의 격이 인간으로 낙하한 것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 변화하였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인간의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변화는 물길처럼 이어진다. 돌 하나를 스치는 천이 그것을 깎아내어 먼지로 부스러지는 때에 이르기까지 수천 수만, 수 겁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무릇 인간의 마음이란 돌과 같이 단단하나 모래알과 같이 쉽게 부스러지곤 했으니 천차만별의 모양을 갖기 마련이었다. 천녀의 천이 스치우기도 전 바스라지는 것도 어렵지 아니한 것이 인간이었다. 그러한 계절의 흐름이었다.
밤을 환히 비추던 불꽃과 비명이 가라앉은 이후로 눈꽃이 나려앉던 시기도, 하늘에 불꽃이 수놓아지는 시기도 쉼 없이 지나갔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던 삶에서 시간의 제약을 받는 삶으로 발을 딛은 생명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새로운 것이었으며 낯선 것이었을 뿐. 가뿐히 오르던 지붕이나 나무 위는 상당히 멀어져 버렸고, 길게 늘어져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은 손짓 한 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식이를 요하지 않던 신체는 허기를 알았고, 수면을 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았다. 이성과 본능 사이의 줄타기는 대게 이성의 승리로 끝이 났으나 본능이란 것이 마냥 백기를 들지만은 않았다. 의지로서 조절할 수만은 없었고,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제어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왕은 인간이 된 신수를 여전히 곁에 두었다. 흑주작이라는 호칭을 거두실 것을 청하였으메 왕은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퍽 낯선 듯 했다. 그럼에도 군신관계로서 신하의 도리에 따라 존함을 감히 담을 수 없다는 이에게는 아쉬움을 표했다.
"이제는 거두셔도 됩니다, 전하."
"하지만..."
"인간의 규율에 따라야지 않겠습니까."
"...류환."
"네, 전하."
"...류환은 전처럼 부르지 않는 겁니까."
"인간 사이는 호칭이란 게 중요하다더군요. 감히 전하의 존함을 쉬이 담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만을 모시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말이지요."
"...당신은 그래도 됩니다. 원래도 그리 불러주었잖습니까."
"그 때는 내가 인간이 아니었잖습니까."
"제게는 인간이 되어도 별 다를 거 없습니다. 류환은 류환이지요."
"이런, 다를 게 없지만은 않지만 말이죠. 하나, 그리 이야기하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런 것까지 적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굳이 애써보지 않도록 할까요. ─라는 쪽이 좋으신게지요, 일?"
"그... 그쪽이 아닙니다! 저에게 대하는 태도만 그대로시면 되고 다른 건 노력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이 패자 없는 싸움의 승자는 왕인 것이 자명했다. 인간이 되었어도, 그것은 오직 제 왕의 안위만을 중히 여겼기에.
암행이라는 이름을 쓰고 거리에 나선, 어느 밤 깊은 날. 자시(子時)에 이르러 해는 저물어 서산 너머로 기운지 오래였고 뛰노니던 아해들도 제 어미품으로 안겨들 시간이었다. 밤을 비출 달은 구름 너머에 가리워 옅은 빛만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깊은 곳. 노령의 이들에게는 쉼터이기도 하며 아해들이 숨바꼭질을 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그 곳에 수 십, 수 백년을 제자리를 지켜왔을 마을의 나무가 어둠 아래에서도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겨우 내 마른 가지로 버텨내오던 것은 입춘이 지나며 푸른 잎을 머금었고, 흰 꽃이 가지 끝마다 영글었다.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이 결을 쓰담으면 꽃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그런 풍경 속에 왕이 있었다.
적막한 밤. 기척일랑 없을 곳에 두 인영이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긴 머리칼을 뒤로 한 채,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화국의 왕이었다. 그의 뒷편으로 사내가 있었다. 호위도 물린 상태에서도 유일하게 물리지 않은 대상이었다. 유일하게 물러나지 않았던 대상이었다.
"전하."
부름에도 응답이 없이 왕은 물끄럼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묶이기라도 한 듯. 나무에 맺힌 꽃송이들이 저항없이 떨어지며 바닥에 자리했다. 아직 채 지지않은 생생함이 남아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으나, 이미 제 가지에서 떨어진 것은 생명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벌어진 거리를 두 어 걸음 좁혀내면 등을 내보이던 왕이 나지막하니 운을 떼었다.
"류환."
"네. 하명하시지요."
"...제가 부탁하면."
왕이 돌아선다. 둘의 시선은 큰 높이차를 내지 않았으나, 거리로 인하여 온전히 마주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여,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게 입 맞춰주실 수 있으십니까?"
상기된 것은 이 봄의 온기일까, 지난 노을 아래 기울인 술의 향이던가. 물기에 젖었다가 메마른 목소리였던가.
"나를 향한 신의를. 증명해주시겠습니까."
바람이 불어, 무엇인가 부서졌다.
"...알겠습니다, 일. 그것이 나의 신의를 증빙하는 것이라면."
"이게 무엇을 뜻하는 지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좁혀지던 거리가 성큼. 가까워진다. 그에 따라 마주하던 시선이 어긋나듯 하여 고개가 서로를 향해 기운다.
"적어도, 지금의 일에게는 필요한 일인 것이겠지요."
봄 철의 바람이, 열기를 품었던가. 물기를 품었던가.
류환은 일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숨결이 허공에서 흩어지기 전, 서로에게 닿을 정도의 거리가 되면 눈동자에 담긴 모습이 마주 보인다. 뺨은 감싸듯 쥔 손이 흐르듯 왕의 목을 받치면, 허락을 구하는 것마냥 멈춰 선 채다. 마주한 일은 찰나의 당혹을 넘어 피하지 아니하고서 웃음을 그린다. 그것을 허락이라 여긴다. 물러나는 이는 없었다.
"전하께서 허하셨으나, 결례를 범하겠습니다."
숨결이 섞인 순간이었다. 들이쉬는 호흡에 열린 문을 통해 낯선 온기가 침범한다. 뻣뻣해진 목을 받치는 손은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굳어진 몸을 감싸는 한 손은 긴장으로 가득찬 등허리를 가벼이 받쳐낸다. 일의 뒤로는 나무의 거대한 줄기가 있어 그에 부딪히지 않도록 공간을 두었다. 길을 잃은 두 손은 방황하듯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다가 저를 감싼 두 팔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긴장으로 수축되는 근육은 자연스레 자신에게로 당겨내듯 하였고, 그에 응하듯 거부감없이 당겨진다. 숨이 통할 공간마저 사라졌기에, 일을 품 속에 가두듯 하였다. 남청빛이 손가락 사이로 흐른다.
눈 앞에 바로 보이는 이의 표정을 눈에 담아내던 이는 곧 자신 또한 눈을 감았다. 기우는 몸을 받쳐내니 소맷자락을 붙잡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뻣뻣해진 목을 받치며 손 끝을 쓸어내면 그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이 또한 낯선 행위임은 자명하나, 어째서인지 퍽 자연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여지껏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의 안을 간질였다.
타액이 넘치지 못하여 목으로 넘어가기에, 누구의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달빛은 여전히 구름 너머로 모습을 감춘 채였고, 널리 펴진 나뭇가지가 드리운 아래 그곳은 하늘조차 탐하지 못할 비밀스런 장소가 되어 있었다. 이 땅에 잠들어 있던 신은 이미 떠났고, 하여 자리한 것은 인간 뿐이었기에 두 사람은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온연히 둘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작은 증명이었으나, 류환은 증명의 선을 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는 못했다. 탓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맞닿은 살결로 무엇을 나누는 지, 무엇을 느끼는 지는. 그 누가 알 것인가.
은사가 늘어지다가 끊어지면 숨을 되찾고자 지난한 호흡이 이어진다. 그 순간을 훑어내는 것은 류환의 손가락이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일의 눈동자보다 방금까지 저와 맞닿았던, 숨결을 나누던 곳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듯 훑어내었고 그 끝에서 잠시간 멈춘 숨을 느꼈다. 그제야 시선과 함께 눈가로 함께 올라갔다. 그와 함께 제 안을 다스린다. 행위의 목적을 떠올린다. 일렁이는 것을 가라앉히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가를 마저 훑어준 후, 바른 자세로 곧추선다. 제 안을 두드리는 것을 외면하고 제 앞의 이만을 눈에 담았다. 빈 손을 가리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났다.
애정을 바라지 않았던 행위에 찾아든 것은 누군가에게는 당혹이었고, 또한 종결이었다.
곧추선 모습을 바라보며 찾아든 것은 해방감과 절망을 닮은 무언가. 애정을 바라지 않았으나, 애정의 수단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행위는 그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어긋난 방향을 여실히 드러내는 듯 하였기에. 봄날의 꽃잎은 언젠가 지기 마련이었다. 다시금 피어날지언정.
무엇인가 시작되었던 것이 끝을 맞이한다.
어둔 밤 아래 달빛마저 닿지 않는 그늘 속. 암행은 밀회가 되어 둘 만이 공유할 수 있을 비밀을 만들었고, 그것은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할 비밀이 되었다. 외면한다. 실수는 아닐지언정 묻어둘 지도 모른다. 마주하고 꺼내보는 일이 있을 지는 그 누가 알 것인가.
절벽에서 피어나는 꽃은 찾는 이가 없어도 위태로움 속에서 새하얗게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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