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Purple Flying Butterfly Traveling day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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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ody Traveling daydream 2024. 2. 27. 10:32

Traveling daydream

꿈, 그 너머

 

w. SKY

 

 

오베론이 티타니아의 눈꺼풀에 뿌린 꽃 즙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상을 마주한 인간에게까지 시선이 닿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비록 요정왕의 놀음에 이용당한 것이었다 할 지라도, 광대 보텀에게 주어졌던 꿈처럼 달콤한 시간. 오베론이 꽃 즙의 효력을 거두며 안개 너머로 사라지며 끝나버리고 만 시간. 현존했으나 사라져 버린, 그리하여 그저 꿈이었을 무언가로 남아버린 시간들. 지나가버린 시간은 과거에 남아 꿈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어 버렸다.

오베론에게도 티타니아에게도 그리고 보텀에게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되지 않았다. 망상이라 고개를 저으며 백일몽에 불과했다 치부되고 말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사자에게조차 꿈이라 여겨진 일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안개 너머의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은 일이 책 속에만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모든 꿈이 허상은 아니며, 모든 꿈이 망상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허상과 실재의 경계는 무엇에 기준해야 할 것인가.

 


 

어느 동화 속에서 공주는 마녀의 저주로 기약 없는 잠에 빠졌다. 우스꽝스러운 동화는 책 속의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이곳에 뒤틀린 동화가 있다. 공주도 왕자도 없이 오직 마녀의 옷을 입고 고통받아 온 인간의 동화. 숭고한 사명을 빼앗기고 저주받아 마녀가 된 인간의 이야기.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읽어주는 동화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만 현실의 동화는 잔혹하다. 승자는 없이 오직 패자만이 있으며, 아름다운 행복을 논하기보다 잔잔하고 고요한 침묵을 노래한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오직 그들만을 위한 동화. 그들만의 이야기. 그럼에도 관객은 있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독자이며 관객이 존재하기에, 무대의 조명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비추었다.

 

품 안의 온기가 사그라든다. 숨소리가 멎어간다. 오랜 기다림과 영원이라는 저주 속에서 고통 받은 길의 끝. 마침내 마녀이자 인간은 종막을 맞이했다. 영원의 앞에 무릎 꿇고 만 종결자는 바람을 바람이라 칭하지 못한 채 닿지 못할 약속을 남겼다. 봄을 기약하며 겨울 속에서 잠들었다. 다시는 뜨일 일 없는 눈꺼풀은, 겨울잠에 빠진 마냥 가지런하다. 품 안의 이가 더 이상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쉼 없는 시간을 지내온 이. 그에게 영면이라는 이름의 휴식인 죽음은, 나락이었을까, 구원이었을까.

눈이 감긴 시간, 눈이 멎었다. 눈이 멎은 공백의 풍경에 빛이 내린다. 반사된 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들어와 성당을 메웠다. 엷게 퍼진 빛이 마치 손길처럼, 마지막 순간 저주를 벗고 인간의 자리를 찾은 이를 스쳐갔다. 이윽고 손길이 스쳐가고 나면 막이 내리고 무대의 빛이 꺼진다. 존재하지 않으나 가설로 남은 행성을 지켜보던 관객이 물러난다. 더 이상 조명이 비추지 않는 곳에도 이야기는 남았다.

 

겨울이 끝났다.

그럼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무너진 것이 급작스레 제자리를 찾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겨울의 끝에서 봄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머나먼 과거의 거울과도 같은 풍경 속. 그는 아무런 사명도 저주도 짊어지지 않았기에 자유로웠다. 그러니 어디로건 갈 수 있었다. 애초에 그저 거쳐가는 곳이었음을 망각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머물렀다. 굳어 못 박힌 듯 고개를 숙였다.

오르골은 더 이상 소리를 울리지 않아 고요만이 가득했다. 그곳에 남은 것은 두 명의 인간뿐이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이 고독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남은 것은 생(生)과 사(死)가 교차되어버린 얄궂은 운명뿐이었다. 닿지 못한 미래의 약속뿐이었다. 다만, 과거로부터 현재로. 그리고 어쩌면 미래까지 이어질 ─

쉿. 혹시 붉은 실을 믿어?

 

마침내 딛고 선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렇게 봄이 찾아 들면 녹아내릴 흰 눈 속에 모든 것이 묻혔다.

그 후로도 한참을, 언젠가 돌아올 봄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하얗게 서리는 입김이 더 이상 얼어붙지 않을 때까지.

다만 여운처럼 남은 문장이 눈밭에 메아리쳤다.

 

@summer_disu

 


 

눈이 부시다. 부스러진 빛 조각들이 흘러들어 눈가에 닿을 시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자극받은 시신경이 뇌에 낮이 밝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면 의식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얕게 떠오른 의식 한 귀퉁이로 기척이 느껴졌다. 들려오는 기척은 옅은 숨소리와 같았고 지근거리에 있었다. 하나 둘 감각이 돌아온다. 머리칼을 쓸 듯 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누구지? 생각이 느리게 흘러간다.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의식과 신체가 일체화되지 않아 생각이 느린 만큼 행동은 더욱 굼뜨다. 단 1초, 1분의. 아니 찰나와 같은 시간일 지라도 영원처럼 느껴졌다. 미간이 좁혀지고 이윽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면 흐릿한 인영이 빛을 등지고 있었다. 어렴풋한 시야로 보이는 실루엣은 익숙해마지 않았기에, 불확실이라는 미지 속에서 한 명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확인을 요하듯, 하지만 의문형이 아닌 단어. 묵직하게 잠긴 목소리는 그 주인이 아직 잠결임을 확연히 드러내 주었다.

 

"..... 메이"

 

눈 속에 묻은 이름이었다. 언젠가 찾아 올 봄, 그때에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떠오르지 못한 이였다. 그 후로 한참을 담고 있던 이름이었다. 눈이 녹았어도 봄이 찾아오지 않았기에, 꺼내어 본 적 없었다. 잊혀지지 않도록 되새기던 시간들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니 꿈일 것이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은 느리게 흘러간다. 하여, 꿈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다.

빛 조각이 뿌려진 탓에 시야는 여전히 잔상처럼 흐리기만 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낸 이름의 진위를 가려야 했다. 하지만 감정도 기억도 그 무엇도 정돈되지 않아 제각기 춤을 춘다. 그러한 가운데 초점만이 제 기능을 다하고자 한다. 미간이 좁혀지고 눈이 찌푸려진다. 그러자 미간을 눌러 지긋이 돌리듯 펴는 손가락이 느껴진다. 그 손이라도 잡아보면 현실임을 알 수 있을까 싶어 무언가 짓누르듯 한 무거운 손을 움찔이며 움직이고자 했다. 그때 따스한 손이 제 눈가를 덮었고 어둠이 찾아들었다. 이어 조곤조곤 나지막이 속삭이듯 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당장에 손을 치워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가를 덮은 온기에 오히려 안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직 꿈이에요. 더 자야 해요."

 

목소리도 낯이 익다. 익숙하다. 당장 어제에도 이야기를 나눈 사람처럼 말을 건네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름을 되짚듯 꺼낸 목소리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닿아온 목소리는 이 순간이 꿈임을 선언하며 휴식을 권해올 뿐이었다. 듣지 못했을 수도, 아니면 그 자체가 대답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결론에는 닿지 못한 채로 이끌리듯 의식은 다시 가라앉았다. 기민할 감각은 언제나와는 달리 그를 각성시키지 않았다. 빛이 꺼지지 않은 풍경 속 의식만이 심연 속으로 다시금 가라앉고 나면 고요가 찾아든다.

 

주름 잡혔던 미간이 고이 펴지면 그제야 손을 떼어내는 이가 있다. 손끝에서 만져지던 것이 여운으로 남았는지, 제 손끝을 문질거린다. 어렴풋이 뜨였던, 눈앞에 있는 이의 눈꺼풀이 다시금 닫히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어 잔잔해진 표정을 눈에 담았다. 낯선 느낌. 이처럼 잠든 채의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었던가. 경계 없이 편안한 표정을 바라보며 옅은 빛 속에서 문드러질 듯한, 흰 빛이 분명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으나 손가락 사이로 쉬이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손길 따라 움직였다. 그런 와중에도 색색, 숨소리는 고르게 들려왔다. 소리 없는 자장가를 부르듯 잠든 이의 곁에 머물던 이는 곧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 소리 역시 고요했다.

@kiracom0

 


 

덜컹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분단된 지역을 잇는 긴 통로가 바퀴 소리로 요란하다. 틈새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지러이 공간을 메운다. 이제는 까마득해져 버린 과거에는 이렇듯 지하, 혹은 지상을 누비는 철로를 따라 수많은 지역을 옮겨 다니곤 했다. 그러니 다시금 활력을 얻어 움직이게 된 낡은 차체는 한 때만 해도 과거가 남긴 상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활기를 띈 목소리가 가득하다는 것은, 그만큼 통로로 이어진 너머의 풍경을 반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5년. 어쩌면 그 이상. 8 쉘터를 떠난 이들이 지하도시(0 쉘터)를 찾아내고 그 안의 일원이 된 후 두 쉘터를 잇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사람들은 수회의 이별을 겪었다. 이별과 만남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익숙해지기 힘든 것 또한 이별이다. 그렇기에 긴 이별 너머 만남을 재회라고 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형태이건, 결과적으로 재회는 이루어졌다. 기다림, 혹은 그리움. 혹은 낙심. 얽히고설킨 묵은 감정이 다양한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었다.

로더릭 클라우드는 지하철 너머 검은 벽을 눈에 담았다. 투명한 창문은 검은 벽을 배경 삼아 거울이 되어 있었으니,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중에는 낯선 사람도 있었으며, 동시에 낯익은 사람도 있었다.

 

"릭 얘기를 토대로 대략적인 지도를 그려봤어요. 동선을 파악해두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가장 먼저 인공 바다부터 가보자고 했던 것 같은데."

"하루 종일 바다만 보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앞으로 갈 곳이 많으니까, 짐은 적당히 챙겼다지만 지하 도시에서마저 계속 들고 다닐 것도 아니고. 그리고 릭이 이야기했던 곳들 중에서 궁금한 곳도 몇 군데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이미 물어봐 놓곤 또 물어보긴. 만나 볼 사람도 많고, 들려볼 가게들도 있잖아요."

"하루가 짧겠는 걸."

"그러게요. 하루가 짧겠어요."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창밖의 검은 풍경에 붉은빛이 아른거린다. 어두운 통로를 밝히기 위한 일환으로 설치된 붉은 등이 남긴 잔상이 마치 선처럼 이어져 보이는 것이었다. 지하철 내부도 붉게 물들었다. 신기하다는 듯 감탄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지하철 한 편에서 들려왔다. 시선이 그쪽을 향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8 쉘터에 남은 아이도 저렇듯 어리던 때가 있었으나 아이는 엄마를 이해할 만큼 자라났고, 포옹을 하며 안부를 기약할 수 있을 만큼 건강했다.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고, 제 어미가 자리를 비운 시간에도 혼자이지 않을 수 있었다. 수년 전 쉘터를 떠나던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재회의 약속을 나눴던 것처럼, 모녀는 재회를 약속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눈앞에서 감탄을 연발하며 창가를 떠나지 않던 아이가 달음박질하기 직전 부모의 품에 가두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은 무너졌으나 다시금 일어서고 있었다. 여전히 돌연변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불안정 요소 또한 많았으나, 지하가 아닌 지상에도 식물이 움트기 시작했으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금과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중 하나가 이 지하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8 쉘터와 0 쉘터 간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로 몇 번 타 본 지하철이었기에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라 할 수 있었으나, 마냥 같지만은 않았다. 꽤 오래 걸리네요, 하는 목소리처럼 철로의 끝에 다다른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도착한 0 쉘터는 지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인공 태양으로 환한 낮과 같았다. 들어선 건물들은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건물들이 즐비한 곳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착한 곳은 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 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으며,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짠 내음은 이름 그대로 바다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맨 발로도 디딜 수 있는 가는 모래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도 많을 텐데 구태여 모래로 만든 사정일랑, 이 쉘터를 건축한 사람들이 알 것이다. 허나 그런 사정이야 어찌 됐건, 모래사장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길 거리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결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이 망가지기 전의 바다를 직접 경험한 이들에게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는 대체품이겠지만, 그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자 그 자체가 '바다'로 인식될 것이 분명했다. 쉘터가 세계의 전부로 받아들여졌듯이.

다른 점이라면, 깨진 조개껍데기라던가 군데군데 버려진 유리 등의 쓰레기와 같은 위험 요소들이 모래사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분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속에는 물살에 따라 흔들리는 미역이나 산호초 등의 생명체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조개나 산호 등은 분류 자체가 식물이 아닌 동물이었기에 돌연변이의 영향을 받는 무리에 속하므로 재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닷물을 푸르게 하는 것은 빛의 산란에 의한 시각적 요소이기에 연구를 통해 성공했을지라도 그 안에 생물(식물 및 박테리아 등)이 살아가는 것은 복합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오, 필요성의 여부를 따지는 등에 있어 찬반과 같은 논의가 있어 진행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정말 실현되는 거였군요."

 

단순히 감탄이라는 단어 하나 만으로는 정의 내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실타래처럼 얽힌 목소리였다. 지하 도시에 처음 도착한 때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헤아릴 수는 있을 터였다.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그렇기에 말의 의미를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벽이 존재하는 바다. 바닥이 존재하는 바다. 한정된 공간에 자연을 재현한다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갇힌 공간의 바다를 함께 바라볼 뿐이었다.

 

손끝을 물에 담그면, 차가웠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면 서늘한 물결이 사이사이를 유영하며 간질여왔다. 이대로 꺼내어 불어오는 바람에 말리면 손에 남은 염분으로 찐득한 느낌이 남게 되겠지. 한참을 물장구도 아닌 것이 물 안에서 이리저리 손을 저으며 물결을 가지고 놀다가 젖은 손을 꺼냈다. 물을 털어내고 손수건에 손을 닦아내고 나면 손수건에서도 바다 내음이 묻어났다.

해풍이 부는 것은 아니니, 인위적으로 일었을 것이 분명한 파도가 발밑까지 밀려왔다. 샌들이나 슬리퍼였다면 이대로 물속에 발을 담그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니면, 신발을 벗어 손에 들던가. 맨 발을 선택하지 않은 이상 파도에 발이 붙들리지 않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얀 거품을 날름거리는 파도는 뭍에서 옅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파도의 혀를 피해 (인공) 태양 빛에 가열된 모래사장과 바다의 경계를 거니면 발자국이 모래에 자욱을 남겼다. 서로 다른 크기의 발자국이 걸음 따라 나란히 자리해 있다가 밀려온 파도에 쓸려 사라지곤 했다.

 

"참 신기하네요."

 

그 말에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 의미를 알기에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냥. 전부 다요. 저 바다도 그렇고…, 타고 온 지하철도 그렇고?"

"쉘터 하나하나는 참 좁은 세계니까."

"그 좁은 곳에서 10년 넘게 보낸 거네요. 그럼."

"틀린 말은 아니지. 여기건, 8 쉘터 건 쉘터라는 이름만 본다면 같을 테니까."

"…그런 이론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요."

"그랬지. 미안하군. 그럼, 어디로 가보겠나."

 

무슨 의민지 알면서. 어쩐지 볼멘소리처럼 들려온 탓일까, 나직한 웃음소리가 잔잔한 목소리와 함께 울렸다. 괜히 불퉁해져 옆구리를 쿡 찔러버렸다. 윽,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구부린 이가 연기가 멎은 표정으로 가격한 당사자를 바라본다. 숙여진 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과거에 비해 편안한 느낌이었다. 웃음을 담은 표정. 여전히 의문스러운 부분이야 남아있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둘은 과거와 비교한다면 조금 더 자유로워 보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저마다의 얽매임을 지니고 살아가며 그들도 그중 하나였다. 다만 스스로 그 얽매임을 갈무리할 수 있어졌다는 것이 차이점이겠지. 그들의 손가락과 목에서 사라진 서로 다른 반지가 그 증빙이 되지 않을까.

 

지하 도시의 랜드 마크─라고 칭하지만 사실상 지하 도시의 곳곳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를 하나 둘 다니는 두 사람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틈틈이 로더릭을 아는 사람들이 있어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무겁지 않은 분위기에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니다 보면 어느새 정해진 전산 값에 의해 태양빛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며 가게 창 너머에서 풍경을 바라보면, 서산 너머로 넘어가는 노을은 없음에도 어쩐지 노을빛으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법했다.

가볍게 따뜻하게 내려진 커피 한 잔 , 그리고 다른 손에는 찬거리가 담긴 가방을 든 채 어둠 아래를 밝히는 가로등 거리를 걸어간다. 이틀 째의 아침 식사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자 농담인지 알 수 없는, '간편식'이란 단어가 로더릭의 입에서 나왔고 결사반대에 나선 메이의 손에 이끌려 마트에 들렀다 온 이유였다.

8 쉘터에서도 종종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 아래를 함께 거니는 일이 있었다. 그때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분위기였다.

 

지하 도시 내 로더릭의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커피 잔이 바닥을 보인 이후였다.


@summer_disu

 


 

침대 머리맡의 드림 캐쳐가 낯익다.

창가의 화분에 핀 작은 흰 꽃이 낯익다.

비록 흰 빛이지만 푸른색이 어울릴 것 같은 꽃.

집주인이 내어준 침대는 따스했고, 포근하여 끌어안고 잠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잠자리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할 정도로 밤은 평온하게 흘렀다.

 

흰 꽃은, 새벽빛을 받아 옅고 투명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눈이 부시다. 흐릿한 시야가 점차 선명해진다. 두어 번 깜박이며 초점을 되찾고 나면 이미 날이 밝고도 시간이 꽤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는 것이 몸에 배어 근육이 아우성 칠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찌뿌듯하게 당겨오는 터에 가볍게 움직여 이완시키니 굳어있던 근육에서 짧게 탁음이 났다. 넓게 난 창문으로 들어온 빛줄기가 소파를 넘어 닿아 있었다. 인공 태양이기에 하루 24시간은 물론이고 언제나 밝은 낮으로만 유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지하 도시의 하루는 바깥의 시간과 같게 흘렀다. 태양열─혹은 지열─이나 풍력과 같은 자연현상을 이용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이외의 방법으로 자가발전을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상적인, 혹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기에 사소할 부분은 크게 중요하게 와닿지 않았다. 8 쉘터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로더릭의 시선이 소파 근처 테이블에 닿았다. 그 위에는 지난밤 읽던 책 한 권이 있었다. 물이 담긴 잔도 함께 있어야 했으나, 없었다. 그렇다면야 이유는 물어볼 것도 없이 뻔했다. 마치 이유가 무엇인 양 알려줄 요량인지 부엌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둘 뿐이었기에,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뻔한 이야기였다. 부엌, 주방과 거실은 모두 분리되어 있었기에 소파에 앉은 상태에서는 너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무언가 잊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막연히 그런 느낌만이 남아있어 개운치 못했다. 평소 꿈을 자주 꾸지도 않은 편일뿐더러, 꾸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대부분이었기에 여운처럼 남아있는 느낌이 낯설기만 했다.

 

긴 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와 제 차림을 갈무리하고 사람의 움직임이며 온기가 가득히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앞치마를 둘러멘 것으로 추측되는 허리 뒷 편의 리본과 그 위로 주홍빛 머리칼이 길게 늘어진. 메이 홉킨스가 그곳에 있었다.

 

"아침부터 무어가 그리 바쁜 겐가."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인사를 건네는 이는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내가 상당히 늦잠을 잔 것 같군. 자네는 이리 분주한데 말야."

"아하하, 중간에 깼길래 제가 다시 자라고 했더니 잠들어 버리던걸요. 많이 피곤했던 거죠?"

"이런, 그건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끙, 작게 앓는 소리가 개미만 하게 새어 나왔다. 여전히 분주한 메이가 냄비 뚜껑을 열면 갇혀있던 김이 쏟아져 나오며 내용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냄새가 집 안 곳곳으로 퍼져 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작은 접시에 조금 덜어 간을 보는 사이에도 로더릭의 잇새로 난 작은 소리를 들은 것인지 장난스러운 웃음이 따라붙었다.

 

"꿈꿨나 보네요?"

"그런 지도."

 

웃음기가 가득한 질문에 헛기침을 하곤 답을 이었다. 물 흐르듯 어색함 없이 다가가 저가 도울 것은 없는지 시선으로 살피다 보면 눈이 마주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로였는지도 모른다.

깜박. 녹빛과 회잿빛이 마주했다. 무슨 꿈…이라는 단어가 나오다 말고 끊겨버린다.

 

"릭, 도와줄 게 있는지 찾는 거 같은데."

"요리하면서 정돈도 어찌나 깔끔한 지 손 델 것이 없어 아쉽다 해야겠어."

"별소릴 다 하네요. 그 정도야 기본이죠."

"8 쉘터에 있을 적에도 늘 얻어먹었는데, 여기서 마저 얻어먹기엔 내가 너무 미안해서 그러네."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뭘. 신경 안 써도 된대도."

"정말이지…."

"못 이기겠다고요? 이 부분만큼은 늘 내가 이기네요. 그러니 그냥 앉아있어요."

 

천연덕스레 웃는 모양새를 보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숨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기도 했고.

 

"그럼… 그저 내가 자네가 차린 상에 하나 얹는다고 생각해주게."

 

무슨 소리? 하고 돌아보면 어느샌가 손에 들려있는 계란. 기술의 개발로 인해 인공육이 대중화된 듯, 마찬가지로 인공적으로 합성되어 만들어진 무정란이었다. 이처럼 많은 것들이 과학의 힘으로 대체되어 있으니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도 했다. 그럼에도 자연은 되살아나고자 노력하고 있었으며, 자연을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흠~ 그렇단 말이죠. 잠깐 이 쪽 좀 봐 봐요."

 

팬을 찾아든 로더릭이 잠시 손에 든 것을 내려두고서 그를 향해 돌아서면 앞치마가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지난밤 찬거리를 사면서 함께 구매한 것이었다. 메이야 평소에도 앞치마를 메고 요리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앞치마를 고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로더릭은 앞치마를 메어 본 일이 없었다. 당당하게 하나를 더 구매하던 모습에 의아해 할 수밖에. 하지만 굳이 막을 이유 또한 없었던 사유로 지금에 이르렀으나… 그 앞치마가 이 타이밍에 내밀어질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의도가 너무나 명확히 보였기 때문인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꼭… 해야 하나?"

"그럼요. 얼마나 중요한 건데요."

 

단호하게 답을 한 메이가 로더릭의 허리에 앞치마를 둘러메어주었다. 동그란 정수리가 시선 아래로 숙여지고, 이내 '돌아서 봐요.'라는 말이 떨어지면 얌전히 제자리에서 뒤돌아 섰다. 그러면 허리 뒷 춤에서 끈을 모아 쥐곤 둥글게 매듭지어 리본으로 마무리했다. 탁탁. 다 되었다는 말이 없어도 의미를 알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런 와중, 어깨너머로부터 로더릭의 목소리가 건네져 왔다.

 

"이것 참 … 낯선 경험인걸."

"익숙해져도 괜찮은 경험일 거예요."

 

로더릭은 메이가 메어 준 앞치마를 가만 보다가 풀지 않은 채, 비어있는 화구에 작은 팬 하나를 올리고 온도를 높였다. 바로 옆 화구에서는 메이가 올린 스튜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샐러드를 할 요량인지 씻어낸 치커리와 로메인 등이 볼에 담겨 있었다. 씻어낸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채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맺혀 있어 싱그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요리사 메이 홉킨스는 앞치마를 두른 채 볼에 계란을 깨어 풀고 잘게 썬 파를 넣어 섞는 로더릭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자신의 안목으로 고른 앞치마는 무채색의 로더릭에게도 자연스럽게 매치되어있었다. 리본이 비틀리지도 않고 반듯하게 매듭지어진 것도 내심 뿌듯해지며 자랑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마저 들 정도로. 달궈진 팬에 풀어둔 계란을 적당량 붓는 모습이 이어졌다. 치이익─. 기름과 날계란이 만나며 나는 요란한 소리에 뒤이어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처음 보네요. 릭이 요리하는 거요."

"그간 보여줄 일도 없었잖나."

"그래도요. 돌아온 후에도 본 적 없었는걸요."

"하지만 전보다 잘 챙겨 먹고 있다는 건 알았으니, 괜찮은 게 아닌가 싶은데."

"정말이지…. 자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더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줄 알아요. 당장에 어제도 간편식 이야기 꺼낸 게 어디의 누구더라?"

"뭐…,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푸짐하게 만들고 있는 건가 보군."

"하하. 음… 그런 의미에서…… 간 좀 봐 줄래요? 나는 늘 먹던 거라서 잘 모르겠네?"

 

8 쉘터에서 1년 넘게 먹어왔던 음식이었다. 입맛에 맞지 않을 리 만무했으나, 메이가 내민 접시에 입을 가져갔다. 우러난 스튜에서는 야채 육수에 더불어 고기 향이 풍겨왔다. 고기를 썬 흔적은 보지 못했는데, 그 사이 정리한 리스트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적당해. 맛있네. 흠… 오늘따라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

"릭이 먹기에 조금 짜지 않아요? 단 맛은요? 힘 들어가긴. … 조금은?"

"크게 짠 맛이나 단 맛이 강하게 느껴지진 않던데…"

 

말 꼬리를 늘이며 메이를 보던 로더릭이 말을 이었다. 손으로는 익어가는 계란 지단을 뒤집개로 돌돌 말고 있었다. 여차하면 찢어질까 조심스러운 것이 눈에 보였다.

 

"국물만 먹어 보았으니 육수에 대한 감상을 덧붙이자면... 야채 육수에 고기 향이 섞여서 하나 만으로도 풍족하겠다, 싶은 생각은 들더군. 아직 덜 끓은 것 같던 데도 우러난 국물이 너무 묽지 않고 오히려 진한 축이라 좋더군. 속이 아주 든든해지겠어. 다만, 너무 끓이다가 채소류가 물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되긴 하지만."

"뭐예요 그건. 갑자기 평론가가 되기라도 했어요?"

 

장난스레 덧붙인 마지막 문장까지 말을 마치고 나면 어깨를 툭 치며 이야기하지만, 어쩐지 아까보다는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를 일 없어요. 먹어볼래요?' 하는 물음에 '마무리되고 함께 즐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대답했다. 볼에 담아둔 로메인과 상추 등을 알맞은 크기로 썰어 담고 과일 몇 가지를 곁들이고서 드레싱 소스를 뿌려 버무리고 있자면 계란말이를 끝낸 모양인지 로더릭이 빈 그릇을 정돈하고 샐러드를 담아낼 그릇을 꺼내어 곁에 내려주었다. 샐러드를 덜어 담다 말고 무언가 까먹었다가 떠오른 듯, 아, 하는 작은 감탄사가 흘렀다. '혹시 레몬 스퀴저 같은 것도 있어요?' 질문이 건네지니 스퀴저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닌 스퀴저 자체가 내밀어졌다. 그 속에서는 레몬 향이 확 풍겨오는 것이, 이미 레몬 즙까지 낸 모양이었다. 누가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 준비하고 정리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는 과정들이 이어졌다.

 

차림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든든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음식과 수저, 그릇을 옮기는 과정까지. 메이가 내려둔 토스트에 이어 테이블 세팅을 마친 로더릭이 메이에게 앉을 것을 권했으나, 어차피 거의 다 끓었다며 되려 릭에게 앉아 있으라며 등을 떠밀었다. 스튜의 완성도를 위해 마지막까지 봐야 한다는 말을 덧붙인 것의 진위여부야 파악을 필요로 하는 부분은 아니었다. 먼저 식탁에 앉게 된 로더릭은 식사를 시작할 생각이 없는지, 스튜의 완성을 기다리는 메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건지 메이가 돌아본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에야 이야기하는 건데, 양이 좀 많아요. 늘 하던 양이 있다 보니, 되려 적은 양 하는 게 힘들지 뭐예요."

"그 정도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

"그래서 말인데… 릭. 이거 나눠주러 다닐까 싶은데. 어때요?"

"어차피 둘이서 다 먹기엔 많으니까? 나눠주는 것도 방법이겠고… 사람을 초대하는 것도 괜찮을 텐데."

"그랬다간 릭의 작은 식탁이 무너져버릴 거예요."

"그것도 신선한 경험이겠는 걸."

"하하, 설마. 싶은 거죠? 설마가 사람 잡는 댔어요~"

 

충분히 만족할 만큼 끓어오른 스튜 냄비를 들어 식탁으로 가져온다. 그간 릭은 써 본 일 없을 오븐 장갑이 드디어 세상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비록 오븐을 열어젖힌 건 아니었지만 냉기만 머금던 오븐 장갑이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식탁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냄비를 내려놓는 이에게 내밀어지는 샛노란 색. 포크에 콕 찍혀 내밀어진 것은 다름 아닌 계란말이 한 조각. 정확히 메이의 입을 향한 채로, 로더릭의 시선은 그것과 무관하게 메이에게 닿아 있었다.

 

"이 타이밍에?"

"이 타이밍이 되어 버린 거지."

 

담담하게 답하는 말씨를 들으며 오븐 장갑을 채 벗기도 전 입에 보송보송한 계란말이 한 점을 문다. 적당히 식혀진 모양인지, 입천장을 델 일은 없었다. 장갑을 벗어 식탁 한편에 내려두곤 자리에 앉았다. 입 안에서 흩어져 식도 너머로 꿀꺽 삼켜내는 과정이 끝나고 나면, 로더릭이 스튜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냄비 안 쪽에 갇혀있던 김이 쏟아져 나오며 순식간에 시야는 안개처럼 흐려졌다가 걷힌다. 찰나의 순간, 눈이 내려 시야를 가린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환상이나 환각 혹은 말 그대로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에 여운만이 남아있는 꿈. 그곳에서도 눈이 내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릭?"

"……아. 미안하네. 뭐라고 했지?"

"괜찮아요? 갑자기 멍해져선…"

"잠깐 딴생각을 해버려서. …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군. 다시 말해 주겠나?"

"계란말이요. 포슬포슬하니 부드럽다고요. 릭이 해 준 음식은 처음인데… 괜찮네요, 이거."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군.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걸세."

"걱정했어요? 내 입맛에 안 맞을까 봐? 하하, 릭도 그런 걱정을 다 하네요. 말랑말랑 포슬포슬~ 해서 식감이 너무 좋았어요. 다음번에도 또 먹어보고 싶은걸요~?"

"얼마든지."

"아. 그래도 매일은 말고요. 그러다 버릇 들면 안 되니까요."

"왜? 자네가 계속 음식 해주던 사람이 당장 눈앞에 있는데. 반대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내 즐거움을 뺏을 생각은 아니죠?"

"억울한 표정 하지 말아 주겠나. 자네 행복을 뺏을 생각…."

 

▒▒ ▒▒▒▒ ▒▒▒▒?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제 앞의 이의 것을 닮아있었기에 스튜를 덜어 그릇에 담으며 대답하다 말고 멈칫. 고개를 들어 메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갸웃이는 메이가 보인다. 헛것을 들었나,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연한 느낌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하고 물어오기에 '자네 행복을 뺏을 생각은 없다고 말할 참이었네.' 답하며 덜어 낸 스튜 그릇을 메이 앞에 내려주었다. 계란말이를 먹는 동안 릭이 그릇과 국자를 손에 쥐어버렸기에, 메이는 얌전히 그릇을 받아 들었다. 뭐였을까, 방금의 그 목소리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려앉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꿈을 꾸고 일어났을 적 남아있던 여운처럼. 로더릭은 제 몫의 그릇을 내려두며 말을 덧붙였다.

 

"자넨 여럿이 식사하는 걸 좋아하잖나."

"그쵸. 북적거리는 식탁. 그 분위기.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걸요."

"역시 사람들을 초대하는 쪽이 좋겠어."

"식탁 부서진다니까요?"

"정 안되면 야외도 방법일세."

"진심이에요, 릭?"

"그럼 거짓일까."

"하하, 힘내야겠는걸요? 보자… 지하도시에 누구누구 있더라…"

 

스튜 한 입을 입에 머금으며 지하도시에 있을 사람들을 세어본다. 테티스는 부르지 않아도 오겠지만, 역시 부르는 편이 좋겠고. 록산나도 당연히 초대하고. 애셔도 지하도시에 있죠? 세상에. 그러고 보니 애셔 어머니도 계시네요. 키아나는 일리아나 씨와 8 쉘터에 있으려나요. 한 명 한 명 짚어가며 지하도시에 머무르고 있을 사람들을 확인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5년 하고도 더 전, 쉘터에서 각자의 선택으로 흩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가졌던 회식 때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혼자 준비하기엔 어려움이 많을 테니 같이 하지.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조수 정도는 무리 없을 테니."

"릭이 제 조수인 건가요? 흐음~ 나쁘지 않네요 그거."

"그럼 식사 끝나고 나서 오늘 계획에 덧붙일 내용을 살펴봐야겠군."

"예정된 루트가 있으니까 수정은 어렵지 않겠네요."

"앞으로는 예상을 웃도는 길을 갈 텐데, 이 정도야 어려워선 안 될 테지."

"아하하, 그렇죠. 여길 나서면 한동안은 길이 없는 길을 가야 할 테니까요."

"기대되나?"

"조금은? 그래도 릭이 함께 가준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하면, 믿을래요?"

"설마 안 믿을까."

"전 설마 같이 가줄까, 했거든요?"

"그만큼 신뢰가 없었다니, 분발해야겠는걸."

"흠~ 확신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겠어요."

 

가벼운 웃음소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따스한 향기 속에서 어우러졌다. 식탁 위에 올려둔 구식 라디오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이어지다가 하루를 알리는 DJ가 선곡한 음악이 함께 어우러져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짹깍. 시간이 흐른다. 여행의 시작. 사람들의 도시를 떠나 미지로 나아가기 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여행의 이유는 묻지 않았다. 동행의 이유 또한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곁에 머물렀다. 과거에 재회를 약속했듯, 이번에는 동행의 길을 그렸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향하는 길은 '여행'이기에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신과 불확신의 줄타기 위에서 서로간의 지지대가 되어 나아가겠지. 과거 소속도, 직업도 모두 무관하게 한 사람과 한 사람이자 두 명의 개인으로. '우리'라는 단어가 '함께'로 엮이어서. 그럼에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를 나누며 걸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가 아닌 둘 이기에. 혼자가 아닌, 함께 이기에.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이루어 꽃을 피워낼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을 일상의 식사를 마무리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 밝아진 하늘 아래 기적이 푸른빛으로 빛났다.

─만약, 저를 잊지 않고 기다린다면 그때는… 저를 행복하게 해 주실래요?

메이 홉킨스.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

@kiracom0

*릭이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것 같지만(으아아ㅏㅏㅏㄱ...;;) 어여삐 봐주십사...*


 

* Daydream

: 백일몽(白日夢)

: 단어 그대로의 낮잠(낮에 꾸는 꿈)이란 의미와 백일몽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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