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시작은 없고, 그러니 감정이 고장나는 것 또한 시작을 알 수 없는 법이다. 브리모 A 벨로나는 자신이 고장난 사람임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 시작을 알 수 없을 뿐. 하나씩 죽이고, 삭히고, 자신을 구겨 모양을 맞추다보니 지금의 자신이 남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자신은 잿더미에 불과했다. 그것을 타인이 알아차린다 한들, 말을 보탤 이유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곳을 파헤쳐보고자 하는 이들이 문을 두드리는 것도, 물러나는 것도, 막을 생각조차 없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 연장선으로 위로- 라는 단어는 자신에게 허용치 않았다.
브리모는 제 눈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녹빛 눈동자는 언제나와 같은 빛으로 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썩 대단치는 못한 사람이라서 네 기분을 한 순간에 좋게 만들어 준다거나, 갑자기 널 표현에 능한 사람으로 변하게 해줄 순 없어."
─아마 너도 그걸 바라지 않겠지만. 미뉴에타 힐은 그리 덧붙이며 옅게 웃었다.
"그래도 나, 적어도 네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만큼은 네 감정을 자유롭게 알고 표현할 수 있었으면 하는걸. 그러니까, 브리모. …시간이 허락할 때까진 네게 관여해도 돼? 관여한다고 해도 대단한 건 안 해. 평소랑 다름없을 거야. 그냥 가끔… 네가 괜찮은지 아닌지, 어떤 기분인지…. 그런 걸 물어보면서, 네가 스스로의 감정을 곱씹으며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찰나의 시선이 교차한다.
"…흐흥,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네 자유지만?"
장난스런 투로 돌아온 말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를 보던 브리모에게서 짧은 웃음이 흐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짓궃게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잠시 고갤 기울여 바라보던 이는 이내 고요한 낯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미뉴에타."
그는 도움을 구한 적도 없고, 도움이 필요하다 여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를 도와주고 싶다─고 표현했다. 저를 가엾게 여길 사람이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를 위로하고자 했다. 그의 평안을 바라기도 했다. 혼란과 재미를 바라는 사람이면서. 위로를 거절하고, 손을 돌려보내어도 끝내 그만의 모양새를 하고 돌아오고야 말았다. 기회를 줘보겠냐는 말을 받아들였고, 그 손길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에 이른 것이겠지.
"부담스럽지는 않아. 네가 날 한 순간에 변화시키는 게 가능할 리도 없고. 내가 그럴 사람도 아니기도 하고."
두 사람 모두 알 법한 이야기. 변화하지 않는 사람과, 변화를 거쳐온 사람이라지만 타인에 의한 변화가 아니었기에. 당신에게서 같은 표현이 스친다.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시간은 무엇에도 관여하지 않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결정짓기 나름이지만. 눈 앞의 이가 같은 표현을 다시금 반복하는 건 어째서일까. 하지만, 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 판단한다.
"숨어야 할 일이-이는 당신의 이전 표현을 빌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한 번의 숨. 간극.
"내게 관여해봐." '네가 원하는 만큼.'
다만,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