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열두 달 삼백예순 다섯 날의 시간은 막힘없이 흘렀다. 몇 번의 해가 떠오르고 저물었던가. 몇 번의 낮과 밤을 보내었던가.
인간들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알아내어 날의 흐름을 계산하였고, 그것은 곧 일(日)이 되었으며, 수 일이 모여 월(月)이 되었고 년(年)이 되었다. 매 같은 일의 모음이나, 월로써 모음에는 각기 차이를 보였고, 월이 모여 년을 이루니 그 또한 매 해 같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윤년이 탄생했다. 홀로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그날은 여느 일자와 같았으나, 여느 일자와 같을 수만은 없었다. 윤일의 태양은 여느 날과 다름없으나, 인세(人世)의 기준에 따라 네 번의 해에 한 번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해가 채 뜨기 전, 깊은 밤. 윤일의 달이 휘영청 하늘에 걸린 시각. 지상의 불빛이 저물고 짐승들 또한 눈을 감을 시각.
꼬리를 늘이는 유성 하나가 미리내를 타고 흘렀다.
여느 밤 밝은 날과 마찬가지로 침소는 빛이 문지방을 타고 넘어 내렸다. 그 너머로 잠들지 못한 두 인영이 검은빛으로 아른거린다.
"남은 일은 내 마무리하면 됩니다."
"상고(上告) 되어 온 것이 몇 건인지 알며 하시는 말씀이시겠죠."
"선왕께 듣기야 했지만, 실제로 볼 줄은 몰랐는걸요. 윤일을 앞둔 날에는 꼭 일거리가 많아진다셨는데 말입니다."
"그 일이 이 일은 아닌 것으로 아룁니다만."
"하하....... 어느 쪽이건 일은 일이잖습니까."
결국 류환은 밖으로 나서지 않았고, 일의 곁에 남아 일손을 도왔다. 하지만, 인간의 육신이 된 이후로 본능적으로 찾아드는 졸음을 이겨내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수일이 지나고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벼루에 내려둔 붓이 먹을 흠뻑 머금는 사이 고개가 기울고 있었다. 이러한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는 모양인지, 기우는 이를 눈에 담은 왕은 놀라기보다 가만히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저보다 손가락 하나 이상 정도 차이나는 이를 조심스레 이끌어 이부자리가 마련된 곳으로 향했다. 처음에야 깨워보기도 했고, 방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며, 그대로 둔 적도 있었다. 그러한 일이 몇 번 이어진 후, 일은 사람 하나에게는 퍽 여유로울 제 자리를 류환에게 내어주었다. 류환은 침상에서 눈을 뜨는 때면 상당히 곤란해하곤 했다.
곤히 잠든 이의 고른 숨소리가 흔들리지 않음을 확인한 일은 두툼한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잠시간 숨을 내쉬고자 창을 여니,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더라. 고요한 밤을 다시금 닫아내고서, 탁자로 발길을 돌렸다.
류환이 눈을 떴을 때에는 사방이 암흑이었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천장을 바라보듯 뉘어진 것이 자신의 왕이자 이 방의 주인인 일이 한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검은 풍경을 보아하니 일 또한 잠이 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등불은 어이 된 것일까. 불을 껐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방을 밝히던 등불이 심지를 잃기라도 한지도 모른다. 류환은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몸을 타고 흘러내려 접혔다. 신수일 적이야 어둠 속에서도 인지에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으나, 인간의 몸은 적응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다행일까, 옅은 달빛이 새어 들어왔기에 적응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암흑은 짙푸른 빛이었다.
눈에 담기는 풍경 속의 일은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탁자에 몸을 굽혀 팔을 괸 채였다. 류환은 짧게 혀를 차곤 그에게로 다가갔다. 일의 곁에는 정리가 끝난 상주(上奏)와 상소(上疏)가 쌓여 있었다. 내일 어전에서도 대신들이 꽤나 입을 놀리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직 류환이 인간이 된 것이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여전히 그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일에게 충심으로 임하는 이들이기에 그는 묵묵히 제 자리만을 지킬 뿐이었지만 말이다.
다다른 류환은 몸을 숙였다. ─전하. 하고 부르고자 하던 입술은 달싹이기만 할 뿐 소리를 자아내지 않았다. 대신, 본디 일의 자리였고 방금까지 류환이 자리했던, 비어있는 침상을 돌아보고는 일의 몸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불편한 지 조금은 뒤척이듯 했으나 깨어나지는 않는 것을 보아 피로가 그만큼 쌓인 모양이었다. 곧 부드러운 감촉 위로 일의 몸이 뉘어졌다. 움찔이는 것이 손 끝을 타고 느껴졌으나 방금 전과 같다 여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거기서 멈추고 일어나야 함이 옳았을진대. 두 명 분의 무게가 실렸다. 왕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적막을 깨트리는 불협화음을 내지는 않았으나, 누군가의 심장 소리는 북을 울렸다. 다만 그 소리는 당사자에게만 닿았을 일이었다.
몸을 기울이다 일의 위로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류환은 자연스레 양 팔로 제 몸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의 모습이 류환의 팔 안에 갇히듯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일이리라. 숨소리에도 제 왕이 불편할까 그마저도 죽였으나, 그런 류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일은 애써 눈을 뜨지 않은 채 잠에서 깬 것을 들키지 않고자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디서부터 깼는지는 일만이 알 것이었다. 그럼에도 들키고야 만다. 다름 아닌 짙푸른 어둠 속에서 옅게 붉어진 일의 귀에 의함이었다. 처음의 옅은 농도에야 알아차리지 못했던 류환도 미묘하게 다른 명도를 곧 알아차리게 되었다. 기운 몸을 지지하던 손 하나가 그 귓가를 스치듯 건드렸다. 마치 신호라도 되듯, 어둠 속에서 서로 다른 녹빛이 마주치고야 만다. 잔 떨림 속에서 달빛이 뉘어 들었다. 침묵은 곧 적막이었다. 누구랄 것 없이 운을 떼지 않았고 두 시선은 흔들릴지언정 교차되었다. 서늘한 것은 풍경이며, 등불이 저문 공간이었고 동시에 새벽의 달빛이었으나 그와 함께 더운 온기가 말단에 깃들었다. 그 가운데 짙은 것은 푸르른 미소였고, 소리 없는 사죄의 말은 허공에서 흩어질 뿐이었다.
"...... 류환?"
일의 눈동자가 피하듯 구르다 돌아오고, 일의 부름에 류환의 표정은 부드러워진다. 귓가를 스쳤던 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거두 듯한다.
"네, 전하."
한숨의 틈. 그리고,
"류환이지요, 일."
손가락 끝에 걸려있던 남청빛은 이부자리 위로 포문을 그리며 떨어져 내린다. 류환의 미소에 휘어진 눈매가 함께한다. 마주하는 일은 이미 굳어버린 후였다. 눈앞의 풍경과 밤의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이윽고 죄송합니다. 깨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라는, 한참 지난 사죄의 말이 입을 타고 흘렀으나 어째서인지 퍽 무겁고도 가벼웠다. 일은 입을 꾹 다물었고, 류환은 제 품과 같은 양 팔이라는 간격 사이의 일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으로 일의 눈을 가리웠다.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이어진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다시금 주무셔야지 않겠습니까."
"... 이렇게 하면 더 못 잡니다..."
"....아, ...그렇습니까."
대답이 짧은 시간이나마 늦었다.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으나 어쩐지 가까운 곳에서 멀어진 듯하다 느껴질 법했다. 웃음기가 스민 듯도 했다. 시야를 가리던 손이 내려지면 류환은 바로 앉은 모습으로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류환도 마저 잠을 청해야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내리신 곳이 있는걸요."
"여기서 자고 간 적도 있잖습니까."
"그래선 안 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괜찮습니다."
"주무셔야지요."
부드럽게 이야기한 류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일을 바라보았다. 류환의 손을 내리고자 이불 밖으로 드러나있던 일의 손등에 온기가 덮어졌다. 푸르른 새벽빛이 어둠을 밝히는 시간은 이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조각에 시간을 가둬두듯이.
날이 밝았을 때, 언제 잠이 든 것일지 모를 일은 몸을 일으켰고 간밤의 일은 꿈이라도 되듯 잔상만을 남긴 채 존재하지 않은 양 지워졌다. 새벽의 짙푸름도, 기울어졌던 두 사람분의 무게도, 나누던 시선도.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침소 문 밖에서 익숙한 류환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하루의 끝이자,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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